비상계엄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국가 위기 상황을 빌미로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고 군사력을 동원해 정권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악용되어 왔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총 16차례나 선포된 비상계엄은 대부분 독재 정권이 민주화 요구를 억압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이는 군사력을 동원해 민간 통제를 강화하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심각하게 제한하는 결과를 낳았다.
비상계엄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승만 정권에서 9번, 박정희 정권에서 3번 등 주로 권위주의 정권 시기에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4.19 혁명, 5.16 군사정변, 유신체제 선포, 부마항쟁, 5.18 광주민주화운동 등 중요한 정치적 사건들과 맞물려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 이는 비상계엄이 국가 안보를 위해서가 아니라 정권 유지를 위한 도구로 악용되었음을 보여준다.
여순사건과 제주4.3사건: 최초의 비상계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발생한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21일 최초의 비상계엄 선포로 이어졌다. 당시 계엄법이 제정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일제강점기의 ‘합위지경’을 적용해 계엄을 선포했다. 이어서 제주4.3사건과 관련해 1948년 11월 17일 두 번째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 이 두 사건은 새로운 정부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이었고, 정부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군사력을 동원했다.
여순사건과 제주4.3사건에 대한 비상계엄은 1949년 각각 2월 5일과 12월 31일에 해제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많은 민간인들이 희생되었고, 이는 향후 비상계엄의 위험성을 보여주는 첫 사례가 되었다. 특히 제주4.3사건의 경우, 비상계엄 하에서 진행된 군경의 강경 진압으로 인해 수많은 무고한 주민들이 희생되었고, 이는 오랫동안 한국 사회의 아픈 역사로 남게 되었다.
4.19 혁명과 5.16 군사정변: 비상계엄의 정치적 활용
1960년 4월 19일, 이승만 독재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자 이승만 정권은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 주요 도시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그러나 이미 수십 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후였고, 비상계엄 선포는 오히려 시민들의 분노를 더욱 격화시켰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하고 4.19 혁명은 성공했지만, 이 과정에서 비상계엄이 독재 정권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었음이 드러났다.
이어서 1961년 5월 16일,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부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키며 다시 한 번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 쿠데타 세력은 ‘군사혁명위원회’를 구성하고 비상계엄을 선포해 4.19 혁명으로 탄생한 민주 정부를 무너뜨렸다. 이는 비상계엄이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군사독재를 수립하는 도구로 사용된 대표적인 사례이다. 5.16 군사정변 이후 박정희 정권은 비상계엄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고 유지했으며, 이는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큰 걸림돌이 되었다.
유신체제와 부마항쟁: 비상계엄의 극대화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은 ‘평화적 통일을 뒷받침하기 위한 정치체제 개혁’이라는 명분으로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유신체제를 수립했다. 이는 비상계엄을 통해 헌정질서를 중단시키고 독재체제를 강화한 극단적인 사례이다. 유신체제 하에서 비상계엄은 상시적인 위협이 되어 국민의 기본권을 심각하게 제한했고, 이에 대한 저항은 가혹하게 탄압받았다.
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에서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인 부마항쟁이 일어나자 정부는 다시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10월 18일 부산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었고, 마산과 창원에는 위수령이 발동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시위는 확산되었고, 결국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으로 이어졌다. 부마항쟁은 비상계엄으로도 막을 수 없는 국민의 민주화 열망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비상계엄의 비극적 결말
1980년 5월 17일,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은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며 사실상의 쿠데타를 감행했다. 이에 저항하는 광주 시민들의 민주화 요구는 잔혹한 군사력으로 진압되었고, 이는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비상계엄 사례로 기록되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비상계엄이 얼마나 폭력적이고 반민주적일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5.18 당시의 비상계엄은 1981년 1월 24일까지 456일간 지속되며 가장 오래 유지된 비상계엄으로 기록되었다. 이 기간 동안 국민의 기본권은 심각하게 제한되었고, 군사재판소가 설치되어 많은 민주인사들이 불법적으로 체포, 구금, 고문을 당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비극은 비상계엄이 더 이상 국가 안보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독재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했음을 명확히 보여주었고, 이는 향후 한국 사회에서 비상계엄에 대한 경계심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